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차(고대 무기) (문단 편집) == 쇠퇴 == 기병이 등장한 뒤로 고대 전차는 갖은 개량에도, 직접 말을 타는 기병과 비교해서 각종 약점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부각된 각종 약점은 다음과 같다. * 느리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전차 무게 + 1~1.5명의 보병 무게' 때문에 전차는 절대 기병보다 빠를 수가 없었다. 전차든 기병이든 그 목적은 말의 우월한 기동성과 무게에서 나오는 강한 충격력을 활용하고자 하는 것인데 무게는 기병보다 많이 나갈지언정, 속도가 워낙 기병보다 느려서 원래 목적대로 제대로 활용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기병의 충격력으로도 적 보병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고 적 기병은 당연히 전차와 정면대결해 줄 이유가 없으므로 전차의 장점인 기병보다 좀 더 강한 충격력은 어디에 써먹기도 애매하다. * 한대 생산 및 유지비가 비싸다. 마차는 몸체와 바퀴 등 과거에는 전부 수작업을 거쳤기에 제작에 상당한 기술과 시간 및 그에 맞먹는 비용이 들고, 또 한마리만 쓰는 기병보다 기동력을 위해 최소 2~4마리를 쓰는 만큼 몇 배의 말 값이 필요하다. 당시 군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식사량을 가지다보니 매우 비쌌다. * 지형을 가린다. 기병은 말의 네 다리로 달리므로 약간의 언덕과 진창 정도는 문제없이 행군/돌격할 수 있는 데 비해서 전차는 [[바퀴(도구)|바퀴]]가 굴러가야 하므로 정말로 완만한 평지가 아니면 쓰기 곤란하다. 현대의 고무바퀴 [[자동차]]와 달리 고무 패킹은 고사하고 베어링 같은 것도 없는 나무 축에 나무 바퀴이므로, 현대의 오프로드 자동차는커녕 자전거보다도 험지 통행 능력이 훨씬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는 낫전차를 쓰기 위해 평지에서 싸우는데도 땅을 다지는 대삽질을 해야 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수레들의 폭을 일정하게 통일한 이유는, 당시 나라마다 전차 바퀴의 폭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서로 크기가 다른 전차가 왔다갔다하면서 일정하게 패이는 땅의 골의 폭이 달라 이게 자기 나라의 전차에는 레일 역할을 하면서 다른 나라의 전차의 기동성을 저해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평지에서 싸운다 해도 비가 와서 진창이 되면 전차의 기동력은 0이 되어버린다. 성서 [[판관기]] [[드보라(판관기)|드보라]] 편에는 가나안 군대가 전차 부대로 [[유대인]]들을 공격할 때 [[야훼]]의 권능으로 큰 비가 내리자 가나안 군대의 전차가 모두 진창에 처박혀버려 유대인들에게 전멸당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 마부가 따로 필요해서 전투력이 떨어진다. 고대 이집트의 전차는 마부가 고삐를 허리에 고정시키고 활을 든 벽화가 있기도 하니 마부 역시 활을 쏜 듯하며, 4두 전차도 돌격한 이후에는 멈춰서 싸웠다면 마부도 근접 무기로 공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부는 훈련 때나 실전 때나 전차를 조종하기 바빠서(정확히는 말 여러 마리를 통제하느라 바빠서) 주된 전력이라기엔 부족하다.[* 현대 전차에서도 조종수는 조종에 집중해야 하므로 공격무기를 거의 쓰지 않는다.] 그리고 보병의 창은 갈수록 길어지고 투사무기도 발전하는 마당에 이 정도로는 한계가 있다. * 방향 전환이 힘들다. 전차는 현대의 자동차와 달리 바퀴가 그 자리에서 방향전환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따라서 [[무한궤도]]처럼 양 바퀴의 회전방향을 다르게 하는 방식으로 선회해야 하는데 차동 기어나 무한궤도와는 달리 구동계가 원시적이어서 접지력이 충분하지 못하고 양 바퀴를 인위적으로 회전시킬 수도 없다. 초기에는 2륜 전차를 쓰는 등 선회력을 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근본적으로 '전차의 무게로 온 관성 + 여러 마리 말을 통제하는 어려움' 때문에 전복사고가 빈번했다. 그리고 무게가 늘어나 방향전환이 더 어렵던 후기의 낫전차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와 싸울 때 팔랑크스가 전열에 낫전차가 지나갈 틈을 만들자 선회를 못 해서 그 틈으로 그냥 통과하는 대굴욕을 겪었다. * 방어력이 약하다. 당시엔 마개(말갑옷)라는 개념도 없어서 말이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기동력도 약해서 공격받기 쉽다. 이 상황에서 말이 1마리라도 죽거나 크게 다치면 다른 말과 엉켜서 전차가 전복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방어력 문제는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마부가 죽으면 말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니 그 큰 덩치에 아무데나 피해를 입히면 통째로 무력화되는 것이다. 또한 활을 쏠 공간을 확보하고, 느리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최대한 경량화해야 했기 때문에 마부와 탑승 병력의 상반신은 적의 투사체에 그대로 노출되어야 했다. 물론 이건 동일한 시대선상에서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대 전차는 기병보다 훨씬 먼저 나온 병종이며, 기병이 기원전 9세기경에 등장한 것과 달리, 전차는 기원전 2500년경인 [[이집트/역사|이집트 고왕국 시대]]에도 존재했다는 사료가 벽화로 남겨져 있다. 그나마 고대 전차의 다른 장점은 다음과 같다. * 충격력 말 2마리 이상+무거운 차체가 발휘하는 질량이 기병보다 우수하다는 것이다. 고대 전차는 말의 기동성을 희생한 대신 질량을 극대화시킨 병기다. 유일한 장점인 질량을 살리기 위해 아예 후기에는 이를 더욱 살린 낫전차로 진화해나갔다. 그러나 보병의 방어구도 날로 발전해서, 낫전차의 돌격력으로 팔랑크스를 돌파하기에는 어려웠고, 돌파를 시도해도 결과가 시원찮았다. 기병도 [[카타프락토이]]를 시작으로 말까지 마개로 중무장한 중장기병이 등장하여 점차 장창용 충격전술이 등장한다. 그리하여 기원전 300년경 서양에서는 [[필리포스 2세]]가 [[헤타이로이]]같이 장창기병을 양성하고, 동양에서는 조나라 [[무령왕]]이 기병 중심으로 군대를 육성하기 시작하는 등 전차의 입지는 더 줄어들었다. 거기에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낫전차의 완벽한 상위호환인 전투 [[코끼리]]가 있었다. * 낙상사고의 위험성 전차와 기병이 공존하던 시절에는 [[등자]]라는 물건이 아예 없었다. 등자가 없던 시절에는 순전히 허벅지 힘으로 말을 붙잡고 버텨야 했기 때문에 잠시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낙마 직행이었다. 반면에 전차는 몸을 의탁할 곳이 있었기 때문에 전차 자체가 전복되지 않는 한 이런 문제에서는 자유로웠다. 기원전 5세기 서양에서는 [[페르시아 전쟁]], 동양에서는 [[전국시대|전국시대(중국)]] 무렵부터 기병이 전장에 등장하였으며, 기원전 3세기 서양에서는 [[포에니 전쟁]], 동양에서는 [[초한전쟁]] 무렵에는 기병이 전차를 대신해 전장의 주역이 되었고, 기원전 1세기쯤 되면 전쟁병기로서 전차는 유물이 되어버렸다. 마지막까지 전차를 쓴 곳은 유럽에서도 제일 촌동네였던 [[브리타니아]] 정도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서 신기한듯이 언급된다. 사료상으로 마지막으로 고대 전차가 확인되는 전투는 서기 80년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가 이끈 로마군이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칼레도니아인들이 전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다. 동양에서는 기원전 100년 무렵 [[한나라]] [[위청]]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전차를 사용했다는 것이 마지막 기록이다. 이후 [[유라시아]] 대륙 어디서도 전차를 전장에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고대 전차는 등자가 등장하기도 수백 년 전에 완벽히 몰락한 것. 이후 전차는 전투보다는 부가적인 용도로 쓰였다. [[로마]]에서는 [[전차경주]] 등의 유희용이나 의장용으로도 쓰였는데, 로마 최고의 퍼포먼스인 [[개선식]]을 하는 장군은 백마 4마리가 끄는 전차를 타고 로마 거리를 행진했다. 그 밖에도, 일부 중국이나 중동, 유럽의 신화에서도 몇몇 [[신]]들의 탈것으로 가끔 나오는데, 고대 전차가 현역이던 시절 탄생된 신화가 후대까지 남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도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탔다는 내용이 있다. 처음 전차가 발명될 시점에는 전차 특유의 장점들이 충분히 전장에서 발휘될 수 있었다. 기병보다 느리다고 하지만, 애초에 그때는 기병이 없었고 적어도 보병보다는 빠르며 그 기동력 하나만으로도 보병은 거의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전차는 보병을 따돌릴 수 있지만 보병은 전차에게서 도망칠 수 없으니까.''' 고대 전차를 계승한 기병, 그리고 기병을 계승한 현대 전차와 마찬가지로 고대 전차도 같은 전차나 투사무기가 아니면 대응이 불가능했다. 괜히 전쟁사 초기에는 전차가 전장의 핵심전력으로 취급받은 게 아닌 셈. 다만, [[전투마차]](War Wagon)라는 병기는 중세까지도 존재했다. 전투마차와 전차의 차이는 방어용이냐 돌격용이냐의 차이점이다. 전투마차는 기병의 돌격에서 보병들을 방어하고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보병들을 지키기 위한 병기이지, 전차처럼 적진에 돌격하기 위해 만든 병기가 아니다. 전차가 전장에서 사라진 것은 기병과 비교했을 때의 비교 열위는 아니었다. 전차가 사용된 이유를 말의 품종 개량이 안되어서 사람을 태울 수가 없어서이며, 기병이 발생한 것은 말이 품종개량되어 커진 뒤부터이고, 기병으로 전차가 대체된 후 전차가 사라졌다는 설이 흔히 퍼져 있고 학자들도 무비판적으로 해당 설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연구 성과와 유전자 연구에서는 그런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가 없다. 일단 초기 기병과 전차의 말은 가축화 된 초기의 말이나 자연상태의 말과 크기 차이가 전혀 없었다. 되려 기원전 13세기부터 이집트, 크레타 문명, 미케네 문명에서 승마술이 시도된 증거가 있으며[* [[https://www.academia.edu/1532320|출처]]] 청동기 시대의 가축화 초기 시점의 말의 키는 작은 암컷도 136–144 cm, 큰 수컷은 148.2~154.6cm 정도로[* [[https://www.tandfonline.com/doi/full/10.1080/00934690.2022.2143630|출처]]][* [[https://bioone.org/journals/anthropozoologica/volume-51/issue-1/az2016n1a2/Horse-size-and-domestication--Early-equid-bones-from-the/10.5252/az2016n1a2.short?tab=ArticleLink|#]]]심지어 중세 시대 기사들이 타고 다녔던 말들과도 별 차이 없는 크기였다. 철기시대, 고대, 중세 후기까지도 군마는 현대 기준으로 보면 몽골마와 같은 중형마 내지 조랑말 수준이었다.[* Gravett, Christopher (2002). English Medieval Knight 1300–1400. Oxford: Osprey Publishing.][* [[https://onlinelibrary.wiley.com/doi/10.1002/oa.3038|출처]]] 또 몽골말[* 나무위키에서는 [[몽골말]]이란 문서명이 [[몽골야생말]]이란 표제의 프셰발스키말로 리다이렉트 되어 있어서 오해의 여지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야생말]]로 여겨지는 프셰발스키말이 아닌 가축말, 즉 몽골 토종마종을 말한다.]의 경우 유전자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고대부터 인간에 의한 인위적 선택교배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유전적 다양성은 최후의 순수 야생마라고 여겨졌던 [[몽골야생말|프셰발스키말]]보다도 몽골토종마가 더 높다.[* 몽골야생말, 즉 프셰발스키말은 애초에 한번 멸종되어 [[유전자 병목현상]]을 겪어 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떨어진다. 그나마 복원한 현재도 개체수가 2000여 마리에 지나지 않는 [[멸종 위기 동물]]이다.] 즉 유전자 조사에 따르면 몽골토종마들이 가축화되기 이전의 진짜 야생말에 제일 가까우며,[* 다만 프셰발스키말이 오래 전에 한때 가축화되었다가 탈주하여 야생화되었다는 유전자 결과에는 논란이 분분하며, 프셰발스키말을 진정한 야생말로 보는 관점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전세계 다수 마종들의 원산지와 조상 역시 몽골말로 추정된다.[* 참고로 프셰발스키말의 조상은 이 가축말 조상에서 아주 오래전에 분화되어 서로 다른 조상으로 본다. 애초에 가축말과 염색체 개수도 다르고.] 사실 기록에 나타나는 유목민들의 풍습을 보면 이 이유가 짐작이 가는데, 평소에 완전 풀어놓고 기르다가 야생숫말이 쳐들어와서 암말들을 뺏어가거나, 반대로 숫말이 집 나가서 야생암말들을 하렘 삼고 집으로 돌아오거나, 그냥 야생말을 생포해서 가축 삼는 등 기록상으로도 선택교배에 의한 품종개량 없이 반야생 상태로 목축을 계속했던 정황이 나타난다. 몽골말 역시 키가 122~144cm 정도로 현대 기준으론 조랑말 수준이지만 '''[[몽골제국]]은 이 말들을 탄 기병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중기병도 운용했고. 전차의 몰락은 동서를 가리지 않고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보병 전술의 혁신이었다. 중국의 경우 [[손무]]가 오나라에서 일으킨 군사혁신의 결과고, 지중해권의 경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전차가 급격히 쇠퇴한다. 이러한 전차가 없는 보병 전술의 혁신은 공통적으로 전차를 쓰기 어려운 지형에서 발전한 문명[* 춘추시대의 오나라는 정글이었고, 그리스는 산악이 많은 지대다.]에서 나타난바, 농업이 발전한 평야에서 초기 문명이 시작했다가, 평야가 다소 적은 지역에서도 문명이 발전하기 시작하며 지형의 영향을 크게 받는 전차의 특성 자체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